2017.08.13 역사의 주관자(이사야 45:1-13)/ 설교: 권종호 목사의 설교중에서 편집
본문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오늘이 광복기념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압제 하에 지냈습니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스라엘사람들처럼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일본이 동양척식회사를 차리고 우리나라의 농토를 수탈할 때에, 우리의 선조들은 아픔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순사가 휘두르는 매를 맞을 때에도, 아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에도, 아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창씨개명을 당하고, 우리말을 쓰지 못하게 할 때에도, 아픔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징병으로 끌려간 384,841명의 젊은이들이 멀고먼 이국땅에서 아픔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중에서
15만 명은 눈물을 흘리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에 징용으로 끌려간 1,129,812명의 사람들도 고통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요즈음 상영되고 있는 영화 ‘군함도’는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 ‘군함도’는 상영관독점이라는 문제와 영화 속의 우리나라 사람끼리의 갈등과 같은 역사왜곡문제로 잡음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아야할 영화입니다.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 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있는 섬입니다. 크기는 축구장 2개 정도입니다.
1890년부터 일본기업 미쓰비시의 소유가 된 군함도는 섬 전체가 탄광이었습니다. 무려 해저 1,000M까지 파내려
가서 석탄을 캤습니다.전쟁으로 인해 석탄 캘 사람이 부족하자, 일본정부는 1938년 공표한 국가총동원법을 근거
로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강제 징용했습니다. 우리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약 500~800
명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강제노동을 했습니다.해저 1,000M의 갱도는 평균 45°이상의 고온이었으며,
가스폭발사고의 위험이 있었습니다.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기에, 체구가 작은 어린소년들이 강제
징용되어 투입되었습니다.
군함도에 끌려온 사람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채굴작업을 했습니다. 일부는 부적합한 채굴조건으로 병에 걸렸으며,
탄광사고나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도망을 시도하다 바다에 빠져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간
이하의 삶을 산 결과였습니다.
정신대란 이름으로 끌려간 20만 명의 여인들도 고통과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도
모른 채 끌려간 어린소녀들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혹독한 추위로 인한 눈물이었
고, 배고픔으로 인한 눈물이었으며, 나라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